통역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수키 김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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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각이라 술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의 테라스에 앉아 술 팔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탐색전을 벌인다. 만난지 30분도 안되어 대뜸 빨간 책을 꺼내어 들며 첫문장을 읽어보라고 들이미는데, 이거 참 마음에 안드는 문장이어도 감탄하는 척 해야할까, 란 생각이 드는 이상하고 요상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읽어버린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이건 탁월한 문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전 9시에 공허한 마음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나의 절망을 상상케 하기 때문에 괴로운 문장이다. 내가 흡연가였던가는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정말 이 문장이 괜찮은 문장인 이유는 이 문장과 그녀와 나와의 일체감을 이 어색한 순간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내내 느낄 것이라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상관 없이 난 그녀를 온마음으로 느낀다.   

작가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조각조각난 마음들을 주인공이 춤을 추듯 하나씩 주워 올려서 수습해나가는 모습을 아주 무미건조한 문체로 보여주는데, 이런 딱딱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가 되기는 참 쉬웠다. 그리 따뜻한 시선을 갖지도 않은 작가를 따라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사건들을 같이 겪는다. 그녀는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믿게 되어버린다, 내가 옆에서 손 꼭 붙잡고 우리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속 힘을 불어 넣어줬으니까. 

그리고 그레이스. 한번도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수지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타자. 그러나 수지를 수지이게 한 장본인인 언니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대사 하나 없이 현실세계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 서사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소설계의 작은 혁명이 아닐까,  

주인공만 알고 있는 감춰진 과거의 사건들을 감질나게 보여주면서 이미 주인공에 완벽하게 이입을 한 독자들을 약올리고, 알면 괘씸해서라도 책을 탁 덮어버리면 그만이련만, 그러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작가의 마수같은 문장들에 얽혀버려서 책 안으로 끌려들어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군지, 내 뒷목덜미에 소름이 돋던지 말던지도 신경쓰지 못하게 되버리고 만다. 뭐 하나 같이 공감하는 것 하나 없음에도 그녀를 오롯이 느끼게 되는 전율, 독서를 할 수록 느끼기 힘들어지는 자극을 오랜만에 받았다.  

애국심이나 뭐 인종차별, 마음붙일 데 없는 .(쩜)5세대들, 도덕성과 이기심, 뭐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신문보면서 생각해도 되니까 일단은 딱딱해 보이지만 포근한 담요같은 작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덫, 그물, 거미줄, whatever.. 에 걸리고 말 것이라는 걸 당신이나 나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책에 질식사라면 언제든지 두손들고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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