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페스트 中

Posted 2010. 11. 17. 18:15
이 친구를 보니 위안이 되는군. 이자는 물에 빠져 죽을 신수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관상은 완전히 교수형감이거든. 운명의 여신이여. 이자를 교수대에 보내는 것을 고수하라. 그의 운명의 밧줄이 우리의 닻줄이 되도록 하여라. 우리 자신의 밧줄은 별 도움이 안되므로. 만약 그가 교수형을 당할 팔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처지는 비참해지느니라. – 11쪽  
저자는 절대로 익사하지 않소. 비록 이 배는 호두 껍데기보다도 튼튼하지 못하고, 단단치 못한 처녀처럼 물이 새긴 해도. – 12쪽 
그 자는 역시 교살당할 운명이오. 바다 전체가 그렇지 않다며 아가리를 벌려 그 놈을 삼키려고 덤벼도 말이오. – 12쪽  
수만 길의 바다보다는 차라리 한 에이커의 메마른 땅이 더 좋겠다. 히스나 갈색 가시금작화가 자라는 불모지라도 좋다. 하늘에 계시는 신의 뜻대로 되어지이다! 하지만 난 육지에서 죽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13쪽

템페스트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문학선
지은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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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3페이지에 이르는 1막 1장을 읽었을 뿐인데 남겨두고 싶은 대사가 많다. 위에 인용해 둔 부분은 모두 곤잘로(정직한 노대신)의 대사. 폭풍때문에 배가 침몰할 상황에서 관상이 교수형 당할 상이라 안심이 된다니 재미있기도 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건 재미를 넘어서서 인물에 대한 신뢰감을 자아낸다. 이 사람의 신념이 보통 신념의 단어에 따라오는 이성이 아니라 '운명'일지라 해도 말이다. 

이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면 나도 함께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 지금의 내가 폭풍에 휘말린 부서진 배 같은 상황이라도 운명의 여신이 그렇게 정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침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운명에 대한 믿음. 곤잘로가 믿는다면 나 역시도 믿는다. 운명이 날 이대로 침몰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이자의 대사가 내 눈에 섬광처럼 콕콕 처박힌 이유는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기 때문인지도. 어쩌면 내 식대로 해석했거나.

미묘한 경계.

Posted 2010. 11. 11. 17:43
난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이 말을 함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비난과 설득이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를 읽으며 일본문학을 싫어하게 됐고,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읽으며 일본문학에 대한 편견을 버렸으며, 기시 유스케와 교고쿠 나츠히코를 읽으며 일본문학을 사랑하게 됐는데. 하루키보다 훨씬 멋지고 간결하고 깊은 문장을 쓰는 작가도 많고, 하루키보다 훨씬 재미있고 독특한 스토리로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도 많은데 굳이.

[상실의 시대]를 두 번째로 읽으며 이 감성적인 소설의 너무나도 남성중심적인 시선에 놀라고 말았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주위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친구들이 하루키에 열광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토록 남성 판타지에 충실한 소설에 여성권리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열광하는걸까?

사실 난 남녀차별 주의자로, 남자들이 나를 챙겨주는게 좋다. 무거운 거 들어주는 것도 좋고, 기계 고쳐주는 것도 좋고, 맛있는 거 사주는 것도 좋고, 요리해주는 것도 좋고, 노래해주는 것도 좋고, 책 읽어주는 것도 좋고, 설거지 해주는 것도, 청소해주는 것도, 선물해주는 것도,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좋고, 뭐 그렇다. 평등같은거 절대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 여자 여자 하면서 떠받들어주는 건 오히려 좀 짜증난다. 여자를 챙겨주고 싶다,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하는 건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신격화 하는 게 오히려 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같은데 하루키가 그렇게 한다. 여성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어떤 다른 종족,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에 갇힌 존재로 바라본다고 해야하나. 이를테면 눈코입팔다리 다 달리고 두발로 걷는 인간이 상상한 외계인처럼.

뭔말인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쓰다 보니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은 줄 알 것 같다. 전엔 무조건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념으로 갖고 있다고 경멸부터 하고 봤는데, 이제 그러지 말아야겠다. 경계선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제목은 무슨.

Posted 2010. 11. 7. 07:34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요즘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 어제도 4시경에 잤다. 3시엔 라면을 먹었다. 배가 불러 먹을 수 없었지만 너무 먹고 싶어서 1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엔 먹었다. 먹고는 소화가 안되서 죽는 줄 알았다. 후회됐다.

아, 수다 떨고 싶다.

항상 친구들에게 너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까지 시끄러운 애 취급 받는다고 해서 친구들의 빈정을 샀었는데, 난 진심으로 내가 리스닝 펄슨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난 진짜 말 하지 않고서는 못견디는 애였나보다. 마르케스가 말 한 바로는, 릴케가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도 않는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괜찮은 글을 쓸 수 있겠지. 이를테면 이런 글.

향수 어린 과거를 회상하는 내 후각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미각에 관한 한, 술들이 창문 맛이고, 묵은 빵들이 트렁크 맛이며, 시럽이 가톨릭 미사 맛이라고 느낀 적이 있을 정도로 미각을 단련시켰다. 이처럼 주관적인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이론상 어려운 일이나 그런 쾌락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즉시 이해할 것이다.
[이야기 하기 위해 살다] p143
대청소를 했다. 청소기를 돌릴 때 먼지들을 빨아들이며 타닥거리는 소음을 좋아한다. 이 소음은 상쾌하다. 방이 깨끗해지고  있다는 걸 청각으로 느낀다는 건 확실히 재미있는 일이다. 쌓인 먼지를 다 닦고, 옷정리를 했다. 이불도 털었다. 청소를 한 후 하루만에 다시 청소를 하기 전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능력때문에 청소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한 번 하면 한다. 깨끗해서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책도 조금 읽었다. 이젠 스페인어 공부를 해야지.

미드 [모던 패밀리]에는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가진 콜롬비아 출신 여자가 나오는데 페루인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 남미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모르는 난 왜그런지 궁금했었는데 오늘 그 이유를 알았다.

1932년도의 내 삶은 그런 식이었다. 그때 루이스 미겔 산체스 세로 장군의 군부 통치 하에 있던 페루 군대가 콜롬비아 남쪽 끝, 아마존 강 어귀에 위치한 무방비 상태의 마을 레띠시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은 양국 곳곳에 울려 퍼졌다. 콜롬비아 정부는 국민 동원령과 집집마다 가장 값나가는 귀금속을 모으는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포했다. 페루 군대의 교활한 공격에 분노한 애국심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대중적 반응을 얘기했다. 집집마다 자발적으로 내는 귀금속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귀금속 수집인들이 다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였다. 하물며 실질적인 가치보다 상징적인 가치가 더 큰 결혼반지까지 내놓았다.
[이야기 하기 위해 살다] p140
단지 20여페이지만을 읽었을 뿐인데 많은 생각들이 샘솟는다. 아이러니는 내가 왜 책을 읽었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만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고리오 영감(세계문학전집 18)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오노레 드 발자크 (민음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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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새로운 작가들을 시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 엘프리데 옐리네트의 [피아노를 치는 여자]를 읽을 땐 정말이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재미가 없어도 실용 경제서가 아니고서야 끝까지 읽어내고야 마는게 버릇이어서 [피아노-]를 볼 때에도 무지 괴로웠지만 끝까지 읽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책을 거의 2/3가량 읽었을 때부터 책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작가의 책을 처음 시도할 때면 참 그 문체가 눈에 잘 읽히지 않아서 적응하는데에 시간을 약간 필요로 한다. 일기장인 것 마냥 있는대로 배설해내는 소설아닌 소설들이야 전혀 적응할 필요가 없지만,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소설들이 있다. 미카엘 하네케가 선택한 작품이란 이유 하나로 책을 선택하긴 했다만 읽는 내내 적응하고 싶어서 혼났다.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방관자적인 태도로 난 절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멀찌감치 물러 서 있다가 마지막무렵에 책을,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했단 것은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나 왜 딴 얘기하고 앉았니,

 [고리오영감]도 도전하고 싶었던 작품 중의 하나로 기꺼이  넣어 줄테다. 발자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지만 책 제목부터가 ~영감이라니 정말 손이 안가는 이름이다. 재미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마구 온다. 그러나 의외로 이 작품은 순수한 젊은 청년과 화려하지만 뒤가 구린 사교계의 이야기다. _ 물론 이름만큼이나 불쾌한 영감의 이야기도 주를 이루고 있긴 했다.

 한 사람을 두고 '으젠', '라스티냐크', '청년', '법대생' 등등 다양한 주어를 쓰는 것을 한시간을 읽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 한 시간동안 도대체 이 작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오리무중이었을 수 밖에. 또한 부르짖고, 크게 외치고, 풀썩 쓰러져버리는 주인공들 탓에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책을 읽을 때 나는 항상 '나라면-'을 염두해 두고 읽는다. 그런 면에서 가장 공감을 했던 인물은 바로바로 보트랭을 밀고했던 '늙은' 노처녀와 아저씨, 푸아레와 미쇼노양. 나도 삼천프랑을 준다면야 ㅋㅋㅋ 하면서 그들이 한대로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 블로그의 이름을 따왔다. 나처럼 세속적이고 비참한 인간들)

 갑자기 귀찮다................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발자크가 자신은 굳이 대중의 편이라고 했다고 하던데 맞는 말인 듯 하다. 그가 대중을 염두해 두지 않았다면 부르주아와 귀족과 민중을 극명히 대비시켜 놓은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드를 계속계속 생각했다. 불우하고 비참한 빈곤한 돼지들, 화려하되 가난했던 사교계의 인사들을 문학 작품 속에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약간 과장됨에도 불구하고 아주 따스한 시선으로-

 근데 왜 사드가 생각났을까? 같은 프랑스니까?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서? [숏버스]에선 이야기를 섹스로 풀어내더군. 같은 소재로 반대지점에서 세상을 표현해낸거라고 본다. 여튼 사드가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비참한 세상이 고리오 영감의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서 사드가 자꾸 생각나나 보다.

 지구의 가장자리에서 발 붙이고 있겠다고 바둥바둥 거리는 사람들이 별거냐, 우리 모두가 그러고 있다. 인간들이 사는 지구 땅바닥이라는게 늪이 아니면 얼음이거든.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비참해질 수도, 그럼에도 행복할 수도 있고 어디에 서 있는지 상관 없이 으젠처럼 소신껏 인간의 행동이라고 정해진 길을 의젓하게 걸을 수도 있는거다. 

 가끔은 이렇게 완벽한 주인공이 나와서 환상문학인 작품도 읽어 주어야 한다. 

바람구두를 신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한가옥 (이른아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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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비야씨의 세계여행기, 레포트 쓰려고 읽었던 캠핑카유럽여행기, 버스타고 여행하는 어느 가족이야기 이렇게 세개의 여행기를 읽었었다. 여행기를 읽으면 나도 너무 떠나고 싶게 만들거나, 특히 내가 가본 곳의 여행기는 내 추억을 망치거나, 앞으로 가볼 곳의 스포일러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언제부터인가 여행기 읽는 것을 약간 꺼리게 되었는데, 몇 년전에 읽었던 버스타고 여행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불평만 가득해서 책을 읽는 나까지 피곤하게 만들길래 이 때부터 여행기는 잘 안 읽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여행기와 비교해봤을 때 이 책이 더 뛰어나다거나, 유별난 매력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얘기할 수가 없겠다. 여행기 자체를 잘 읽지 않으니까.

정말 순전히 우연하게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어서 약간의 온라인 친분을 쌓다가 마침, 책을 내셨다고 하여 사서 읽게 되었는데 (MBTI 결과에도 나왔듯이 선생님이 좋으면 싫어하는 과목도 좋아하게 되는 성격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블로그에서도 엿보였던 작가의 밝은 성정이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해져서 읽는 내내 상쾌한 바람이 귓전을 맴도는 듯 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내 생각을 그대로 글로 적어둔 듯한 남의 글을 볼 때 나는 쾌감을 느끼며 작가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다. 작은 책이고, 사진이 많기도 하고, 블로그에서 본 글도 몇 있어서 내용적인 측면을 많이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경험과 생각을 짧고 자유롭게 적어둔 것이 많이 인상적이었다. 내 생각이 그대로 출판된 것만 같은 부분도 많았고, 내가 얕게 생각하고 말아버렸던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깊이 통찰한 결과를 적어둔 부분도 많았다. 

혼란스러운 중동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정치사회적인 소소하지만 깊은 생각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존중을 솔직하게 털어 놓은 부분들, 긴 여행을 하며 점차 쌓이는 경험에서 오는 통찰력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여행이 일탈이나 도피가 아닌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내 미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지금의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야기, 유럽에 대한 작가의 생각, 코믹한 굴욕 에피소드 등 때론 심각하게, 때론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즘 중동으로 가는 여행객이 증가하는 추세이기도 하고, 제일 친한 친구도 지금 중동으로 여행을 가있어서 나도 이제서야 이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참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우리나라는 어째 유행이 너무 중요해서 여행도 유행따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생소한 지방의 자유로운 여행기를 보여주며 틀에 박힌 일상에 조금이나마 활력을 불어넣어 준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알다시피 틀에 박힌 일상에 틀에 박힌 여행기는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것만 못하니-  

콜레라 시대의 사랑 밑줄긋기

Posted 2009. 11. 13. 12:42

콜레라 시대의 사랑 1(세계문학전집 97)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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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고모 사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기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무질서하게 성당을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를 너무나 가까이,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 느낀 나머지, 중앙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자 하는 저항할 수 엇는 힘에 복종했다. 
그러자 눈에서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사랑의 두려움으로 굳어버린 입술을 보았다. 자신의 대담한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에스콜라스티카 고모의 팔을 잡았고, 고모는 레이스 달린 긴 장갑 속으로 그녀의 손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로알드 달 (강,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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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맛'이어서 그런지 각기 다른 맛의 케이크를 한조각씩 한조각씩 아껴먹은 기분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배도 부르고 그 맛이 어떤지 잘 음미할 수 없게 되니까 하루에 2개씩. 더 먹고 싶어도 아껴두었다가 제일 맛있을 때 먹는 평소의 식습관을 따라 찬찬히 [맛]을 읽었다. 

첫 느낌은 정말 너무 재미있고 뒷통수 빵때리는 이야기로 독자의 반응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작가의 특권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겠다- 싶었다. 진짜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다른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기 보다는 이 이야기를 내가 재미있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얘기해주고 친구들의 놀라는 표정이나 깔깔거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입술을 옴싹달싹하며 손을 달달 떨었다.  

두번째 느낌은 의외로 공포심이었다. 로알드 달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브라운 신부가 그랬다. 지금까지 그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자기였다고, 살인자의 속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왜,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던 방법은 바로 그 살인자가 되는 방법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브라운 신부는 계속해서 참회하는 동시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추리했다.  

사실 유명한 탐정이나 공포소설가는 바로 이러한 비결을 갖고있기에 사건을 사실과 흡사하게 상상해낼 수 있는 것이다. 

로알드 달의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너무나도 욕망에 충실하여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은 사실 로알드 달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기에 난 로알드 달이 무서워졌다. 그는 평범한 이야기꾼을 넘어서서 너무 사악하고 추악한 인간 자체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00년도였던가, 이 작가가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 선정되었다는 경력에도 경악했다. 무섭다. 

소설가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에 주목하지 않아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보면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인 사람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엉뚱하고 기이한 행각으로 대중을 즐겁게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로알드 달 역시 이런 매력적인 소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당치 않게 재미있었다. 그들에게 평생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를 포착하여 그것을 극대화해서 읽는 사람 벙찌게 만드는 특유의 상상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완전히 말도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게 문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어날 수 없는 에피소드들. 특이하고 재미있고 가슴이 두근두근 한다. 실제로 떨린다.  

하지만 너무 단 느낌- 그래, 심하게 달다. 달콤하게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너무 달아서 약간 쓴맛이 필요하다. 왜, 나는 달달한 카페모카에도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해야 먹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설명하니 명쾌하군. 
[taste]. 발버둥 쳐봤자 난 벌써 로알드 달에게 세뇌당했나보다. 새끼 손가락을 내어 놓아야겠다. 

천사의 속삭임(개정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기시 유스케 (창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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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말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하는가,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다.

 
  - 보통이 설명해주는 몽테뉴의 이론 中 -

기시 유스케는 분명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은 아닐지언정, 똑똑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이 사람의 작품을 2번째로 읽었는데, 이 작가의 노력에 매번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작품에 담긴 노력에 감탄을 하는데 어느정도로 감탄을 하느냐면 중고샵에 이 작가의 책을 파는 것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소장할 정도로 탄성해 마지않는다. 

첫번째로, 그의 정보 수집능력.
기생충에 전혀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어려움 없이 들을 정도로 초등학생에게 설명해주듯 쉽게 설명해주지만, 그와 관련된 방대한 정보를 쉽게 다루지도 않는다.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정보를 바탕으로 실재로 만들고 독자들은 reality와 fiction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부터 그만의 독자적인 공포가 탄생한다.  

다양하고 깊은 지식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놀라울만큼 간결하고 깔끔하다. 공포/호러/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과장도 없고 그저 fact의 나열인 것마냥 작가 특유의 분위기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때문에 [천사의 속삭임]이 더 무섭다. 평범한 도로를 걷고 있는데 절벽으로 가는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은근슬쩍 든달까, 안에 담긴 작가의 무심함이 두렵다. 

두번째로, 그의 스토리텔링.
그의 공포는 철저한 인간탐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부적응자,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옆집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독자의 공포심을 건드린다. 독자는 대중이기도 하면서 개인이라, 쉽게 반응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사소한 것에 의표를 찔려 소스라친다, 예를 들어 거미나 황산, 오염된 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그가 어떻게 이용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지를 확인하려면 마음을 열고 책을 봐야 할 것이다. 흔한 소재라고 다 같은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흔한 헐리우드 소재라는 혹평에 귀를 기울이지 말것. 

세번째로, 그의 철학.
철학이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한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으로 누군가 철학 어쩌고 운운하며 잘난체 한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 생각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될 것이다.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를 읽으며 놀란 것은 그 어느 스승보다도 내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기시 유스케의 작품 외에 프란츠 파농의 저작을 읽을 때와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을 때가 가장 최근의 경험이었는데 한 문장, 혹은 한 문단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날개를 달고 지구 한바퀴를 돌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 이런 대가들에 감히 어떻게 기시 유스케를 갖다대냐고 한다면 난 왜안되냐고 싸울 자신도 있다.  

이 사람이 던지는 화두는 여느 윤리학 서적의 이론적인 질문들보다 더 날카롭고 실제적이다. 뒷 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도 순간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상들은 뇌를 자극하고,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재미에 책을 잠시 떨구고 '딴생각'을 하게 만든다. 텍스트에 질질 끌려가는 보통의 경험과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사의 속삭임]이 매우 무섭고 공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고, 그의 새작품을 기다린다. 그의 작품은 일단 손에 들면 무서워서 놓고 싶어도 감성보단 이성을 자극하는 묘미가 즐겁고, 그때문에 읽고 싶어도 손이 잘 안가는 호러물과는 달리 다시 한 번 더 읽어볼 생각이 든다. 매력적이다.

통역사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수키 김 (황금가지,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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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시각이라 술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의 테라스에 앉아 술 팔기를 기다리며 가벼운 탐색전을 벌인다. 만난지 30분도 안되어 대뜸 빨간 책을 꺼내어 들며 첫문장을 읽어보라고 들이미는데, 이거 참 마음에 안드는 문장이어도 감탄하는 척 해야할까, 란 생각이 드는 이상하고 요상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읽어버린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이건 탁월한 문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전 9시에 공허한 마음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나의 절망을 상상케 하기 때문에 괴로운 문장이다. 내가 흡연가였던가는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정말 이 문장이 괜찮은 문장인 이유는 이 문장과 그녀와 나와의 일체감을 이 어색한 순간뿐만이 아니라 책을 읽는 내내 느낄 것이라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상관 없이 난 그녀를 온마음으로 느낀다.   

작가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조각조각난 마음들을 주인공이 춤을 추듯 하나씩 주워 올려서 수습해나가는 모습을 아주 무미건조한 문체로 보여주는데, 이런 딱딱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가 되기는 참 쉬웠다. 그리 따뜻한 시선을 갖지도 않은 작가를 따라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사건들을 같이 겪는다. 그녀는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믿게 되어버린다, 내가 옆에서 손 꼭 붙잡고 우리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속 힘을 불어 넣어줬으니까. 

그리고 그레이스. 한번도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수지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타자. 그러나 수지를 수지이게 한 장본인인 언니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대사 하나 없이 현실세계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 서사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소설계의 작은 혁명이 아닐까,  

주인공만 알고 있는 감춰진 과거의 사건들을 감질나게 보여주면서 이미 주인공에 완벽하게 이입을 한 독자들을 약올리고, 알면 괘씸해서라도 책을 탁 덮어버리면 그만이련만, 그러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작가의 마수같은 문장들에 얽혀버려서 책 안으로 끌려들어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군지, 내 뒷목덜미에 소름이 돋던지 말던지도 신경쓰지 못하게 되버리고 만다. 뭐 하나 같이 공감하는 것 하나 없음에도 그녀를 오롯이 느끼게 되는 전율, 독서를 할 수록 느끼기 힘들어지는 자극을 오랜만에 받았다.  

애국심이나 뭐 인종차별, 마음붙일 데 없는 .(쩜)5세대들, 도덕성과 이기심, 뭐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신문보면서 생각해도 되니까 일단은 딱딱해 보이지만 포근한 담요같은 작가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 덫, 그물, 거미줄, whatever.. 에 걸리고 말 것이라는 걸 당신이나 나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런 책에 질식사라면 언제든지 두손들고 대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