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주제에 대박.

Posted 2010. 11. 18. 13:42
드래곤 길들이기
감독 딘 드블로와,크리스 샌더스 (2010 / 미국)
출연 제이 바루첼,제라드 버틀러,아메리카 페레라,크레이그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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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3D로 보러 갔다가 예고편으로 이 영화를 봤는데 재밌겠다! 보자!보자! 하곤 그만 잊어버렸었는데, 며칠 전 친구가 나보고 [드래곤 길들이기]에 나온 주인공 공룡과 닮았다는........ 망언을 하며 영화 재밌다고 극찬을 하며 추천을 해주었다.

재밌겠다, 하면서 보기로 한 영화는 금방 까먹으면서 누군가가 추천을 해주는 영화는 보고야 마는 습성은 나보다 남을 더 믿는 데서 기인한 것일까? 그저 그런 영화도 누군가의 평가를 거치면 영화 자체로 보기 보다는 한 단계 옷이 입혀지는데 그게 영화 선정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보통은 방해가 되기 마련이어서 스포는 극도로 자제한다. 하지만 좋다는 영화는 왠만해서는 보고, 싫다는 영화는 왠만해서는 안본다. 반대로 인기가 많아져버린 영화는 또 보지 않는다. 미묘하면서도 까다로운 기준.


어쨌든 주인공 공룡인 투쓰리스는 전혀 나와 닮지 않았는데, 귀엽고 행동이 고양이랑 비슷해서 우리 나옹이생각이 많이 났다. 3년이나 키웠는데, 아빠가 털때문에 못견뎌하시다가 결국은 아는 집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도 모른다. 아마 죽었겠지. 라고 생각하는게 마음이 더 편한게.. 애가 너무 예민해서 다른 동물들이랑도 어울리지 못하고 낯선 사람은 당연히 못견뎌하고 음식도 많이 가렸어서. 여튼 그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뚝뚝 난다. 그 때 고양이 보내고 한달동안 부모님이랑 말도 안하고 애인이 나 맨날 우는거 달래준다고 고생이 많았었는데. 아직도 못벗어난 걸 보면 전애인이랑 추억은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나 싶다.


투쓰리스와 히컵의 관계. 말도 안통하면서 서로 목숨걸고 지켜주려고 하는 거 보면서 눈물이 또 뚝뚝 나는 걸 보면 참 중요한게 언어나 계산같은게 아닌 것 같다. 사람들도 다 그걸 아니까 이런 줄거리에 열광하겠지. 말 없이도 통하는거. 그런게 진짜 아닌가. 진짜 속마음이 뭐든간에 그냥 통한다고 느끼는거. 나옹이가 나 별로 안좋아해서 내가 만지기만 해도 도망가곤 했는데, 혼자 울고있거나 그러면 항상 옆에 와서 가만히 앉아 있곤 했었다. 매번. 마치 안다는 듯이.



히컵과 아빠의 관계. 이 둘은 말 때문에 부딪친다. 서로 말을 하는데 그게 자꾸 튕겨져 나오니까 애정이 비틀린다. 투쓰리스와 히컵의 관계와 대조적이어서 더 안타깝고, 반대로 이들의 우정은 더 빛난다.  나와 아빠의 관계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나와 같지 않다면 인정해줄 수 없다는 아빠의 마음, 그럼에도 어떻게든 내 방식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결국은 '니가 자랑스럽다.'란 말로 둘의 관계는 회복되는 듯 보이지만 진짜 회복은 그 말을 넘어선 진정에 있었다. 무뚝뚝한 아빠의 미안하단 말보다, 평생을 믿고 살아온 것을 포기하는 건 더욱 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던게, 해피엔딩같으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는 거다. 히컵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드래곤들에게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한 나머지 간과할뻔 했는데 모험은 끝나고 구속만이 남았다. 히컵에게든, 드래곤에게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공동으로 무찔러야 할 적,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한사항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언젠가는'이란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으니까.

붕붕 떠다니는_ 박쥐

Posted 2009. 12. 18. 13:31
박쥐
감독 박찬욱 (2009 / 한국)
출연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김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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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영화를 볼 때 좋았다 안좋았다의 기준이 '치유'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학과 수업을 들으면서 작품성과 관련해서 구원이나 치료에 집착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안그래도 비참한 현실은 더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며 왜곡시키는 작품들은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미술품의 경우에는 아무리 추해도 그게 고정관념이다, 싶어서 더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문학이나 영화같은 장르는 아무래도 인간의 삶을 고대로 그려내는 장르이다 보니 영화에서 보지 않아도 지긋지긋하다. 당신들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난 충분히 힘들단 말이다.

이렇게 불쾌해하는 대표적인 작품이 박찬욱감독의 영화들과 강도하의 [큐브릭]이었는데, 그냥 내 취향이랑 달라서 별로인것이지 딱히 작품성을 갖고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서 이런 저런 리뷰들을 많이 찾아봤는데 나같은 문외한은 찍소리도 못할만큼 박학다식한 분들께서 해석한 글을 보면 참 꿈보다 해석인가 싶다.  

이상하게도 박찬욱감독의 영화를 자꾸 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의에 관계없이 보게 되는데 그만큼 감독이 유명해서인가 싶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배트맨 시리즈처럼. 
이번에 본 [박쥐]도 차마 거절을 잘 못하는 나를 어찌 잘 알아보신 분께서 덜컥 예매를 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봤다. 영화가 끝난 후에 내가 딱잘라 별로였어요- 라고 하자 죄인취급한다며 날 몰아붙인다. 흥, 보고 나니 더 우울한걸 어째?! 

김옥빈의 캐릭터가 참 특이했다.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성격이 왔다갔다 하니 종잡을 수가 없다.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너무 황당하니깐 그냥 이렇게 살 수도 있는거구나, 하면서 봤다. 하긴 이 영화에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다. 알 수 없는 중국풍의 분위기와 신하균은 암이라더니 기도 받고 나은건가? 뽕짝과 클래식의 어이없는 조합은 무엇이며 둘의 죽음은 엄마에게 복수인가 선물인가? 우리 감독님은 [사이보그...]이후로 흰색에 집착하나? 끔찍한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들은 뭘까- 잔혹함에 길들여져 버린걸까.. 그냥 야하니까 좋았다는 이 남자는 또 뭔가.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도덕성을 믿지 않는 만큼, 인간의 악한면도 별로 믿고 싶지 않다.
친구를 죽이고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본능을 억지로 제어하든, 그녀의 꼬심에 넘어가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죽여버리든, 그리고나서 그녀때문이라고 착한척을 하든, 별로 절박하지 않아보인다. 

몽유병이라며 맨발로 밤거리를 뛰어다니든(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사실은) 신부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든, 엄마 미안하다며 울고불고 하든말든, 맛있다며 여럿 죽여서 죄책감 없이 피를 마시든, 매력적이지도 않다. 예쁘긴 하더라만;

영화는 그닥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주기는 커녕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않는다. 
봐라, 이게 너희들이 사는 세상이다. 라고 잔혹하게 피를 뿌려가며 이야기해준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이런 세상을 굳이 뉴스를 보지 않아도 상사에게 성희롱 당하는 친구, 밤새서 일하지만 누군가의 월급의 반도 못받는 친구, 사기당해서 울고불고 경찰에 신고해도 들은척도 안한다고 우울해하는 친구들 얘기만 들어도 우리는 다 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냥 눈돌리고 피해버리고 싶은 걸 곧이 곧대로 보라고 강요한다. 
만약 감독이 유명하지 않고, 매니아 층만 확보한 상태였다면 난 이렇게 불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이제 다수의 관객에게 노출된 상태이고 이러한 강요는 사실 아직 정신이 성숙하지 못했거나 약해빠진(미성년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상당한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불쾌한 것이다. 

예전에 여러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달콤한 독에 관해서 포스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박쥐]는 그 개념이 아니다. 안그래도 쓴 맛을 이리저리 고약한 것을 섞어서 뱉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근데 이게 끈적끈적해서 잘 안뱉어지니까 문제다. 난 불편한 영화를 무작정 폄하 하는게 아니라구요.

아, 정말 무엇을 상상하든 화면을 넘어서서 최악을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상세보기


외국에서의 받아봤던 인종차별이란,  
성적으로 노리개감의 목표물이 된다는 것 정도- 아무래도 한국이나 일본 여성들의 이미지가 외국에선 좀 낮고, 호기심이 생긴단 걸 알기도 하고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위험하지도 않았고 대놓고 섹스하자고 달겨들기보단 좀 더 신사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인종차별에 비하면 귀여운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시아계 남자들의 경우 좀 더 심한 경우도 있었지만 영화에서의 폭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에드워드노튼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면 말도안되는 인종차별이론이라도 진짜 설득력있다.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흑인들, 아시아인들이 굴러들어와서 백인들의 터전을 빼앗고, 일자리를 빼앗는다. 빌어먹을 평등정책때문에, 능력있어서가 아니라 흑인이기 때문에 원래 백인들의 것이었던 일자리를 얻고 더 나은 권리를 획득한다. 백인들이 낸 세금은 이주민들을 구제하는데 사용된다. 

아, 사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나 또한 백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빈곤층이나 외국인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정책때문에 손해를 봤으면 봤지, 덕을 보는 입장은 아니다. 따라서 스킨헤드들의 이론과 분노에 쉽사리 휩쓸릴 뻔 했다. 사실 물밀듯 이주해오는 흑인이나 아시아인을 위한답시고 인권이나, 사랑,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이런 사상이 무슨 상관이야, 일단 내가 손해를 보는데!  

그러나 영화 중반부부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당당하게, 거리낌없이 흑인들을 살해하고 감옥으로 들어간 에드워드노튼은 소수의 입장에 선다. 감옥에선 백인보다 흑인이 훨씬 월등하다. 그 곳에서 말 한마디 섞고싶지 않았던 함께 일하는 흑인과 소통하게 되고, 그가 고작 TV를 훔친 죄로 6년형을 구형받았단 얘기를 듣고, 순진하게 백인우월주의를 외치다가 믿었던 백인집단에게 강간당하며 그 동안 그를 지탱하고 있던 온 세계가 흔들리게된다.   

결국 그를 보호해주던 백인집단에서 벗어나 흑인집단의 보복성 린치를 기다리지만 그에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출소하여 더 막강해진 스킨헤드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을 추앙하던 동생도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말해졌던 것 처럼 그들은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대상이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될 수도 있고, 백인이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기득권층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쏟아냈을 때 댓가는 꼭 치루어야 한다. 물론 치루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서 문제일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랑하며 살자, 그 분노의 창 끝이 나를 향했을 때를 두려워하며- 


* 꽃남이 짤방   

널 사랑해_ 숏버스

Posted 2009. 12. 10. 13:07
숏버스
감독 존 카메론 미첼 (2006 / 미국)
출연 숙인 리, 폴 도슨, 린지 비미시, PJ 드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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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장에 가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나의 스타에게 나는 그저 소리지르는 군중의 한명이 되는 기분이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대 위의 배우나 가수의 인생에 비해 내가 너무 보잘것 없어 보여서 요즘은 연극도 잘 안보게 된다.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스탠딩콘서트 예약을 하곤 혼자(!) 가서 봤던 콘서트가 존 카메론 미첼이 한국에 왔을 때였다. 난 그만큼 그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사랑한다. 그날도 굉장히 슬퍼져서 집에 오긴 했다.

호주에 있을 때 숏버스 개봉소식을 듣고 마침, 근처의 작은 영화관에서 상영한다고 해서 거의 달려가다시피해서 영화를 봤다. 그 때 같이 봤던 애인은 게이혐오자였는데 영화가 끝난 후 나와 약간의 말다툼을 했다. 그는 내게 제임스가 아름다워보인다며 내가 이상해진걸까.. 라며 평소에 비해 엄청나게 양보를 한 편이었는데, 난 약간 비아냥거렸던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보고 감동받지 않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싫어하는 걸 나때문에 본 것이었는데 좀 잘해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미안- 

어젠 토요일 밤이었는데 늦잠을 자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서 안자고 뒹굴거리다가 아이팟에 들어있던 [숏버스]를 발견하곤 보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보고 안들리는 부분이 있어서(많았나?) 자막을 보며 다시 한 번 보고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ㅅ오빠가 전해줘서(고마워요- ) 갖고 있던 것을 이제야 본 것이다. 

내가 그 때 생각보다 많이 이해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영어 잘했었나요.... ㅋㅋ 아무래도 영화가 대사로 전달하는 종류가 아니어서였던 것 같다. 음악은 가슴떨리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어쨌든 영화는 해피엔딩이고, 사람들은 웃으며 노래하며 영화를 맺는다. 나도 씩 웃으며 잠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날 땐 뭐가 그리 슬펐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난 일종의 공황상태였다. 슬프고 아프고 답답한 익숙한 기분.  왠지 이별했던 다음날의 기분이랄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아래는 2006년 11월,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적어두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얽매이는 것, 아니면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나보다. 그리고 꿈꾸며 술마시던 국문과 인맥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삶을 준비하는 보통 사람들을 만나서 문화적 충격에 휩싸여 토익공부를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는 사실 얽히고 섞여 있어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란다. 멀리서 보면 하나지만 사실은 다 이리저리 갈려 있어서 따로 놀고 있대. 셋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애인이라 규정되는 사람은 꼭 남자, 여자, 내 또래 가 아니어도 되고 남녀노소 누구와도 다 사랑할 수 있대. 
 육체적인 사랑도 마찬가지. 어떻게 다른 여자랑 잘 수가 있어? 라고 말 할 필요가 없는 거지. 어떻게 다른 남자랑 잘 수가 있어? 마찬가지. 너도 걔랑 자도 되고 나도 걔랑 자도 되고. 셋이 자도 되고. 다섯이 자도 되고. 다 같이 사랑하면 되는거고.
  버스에 잠깐 올랐다가 내리듯 그렇게 인연은 지나가고 만나고 그러는거야. 진정한 사랑을 못찾아도 그만, 그냥 스쳐가는 여러 사람들 만나면서 외로움 달래고. 영원한 사랑을 찾아도 그만, 한 사람과 평생 친구인듯 가족인듯 서로 외로움 달래고. 굳이 얽매이지 말자. 풀어질 인연은 풀어져 서로 따른 인연과 얽히고, 엮일 인연은 어떻게 해서도 묶이게 마련. 
그렇게 넋 놓고 살다가 난 뭐 먹고 살아? 
물어보기도 전에 영화는 끝났다.
SHORTBUS는 떠났다.

 
   

 PS/ 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한단다.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좋은 건 나만 소중해하고 싶은 습성이라 ㅎㅎ

2009.02.22 작성


러브 오브 시베리아
감독 니키타 미할코프 (1998 / 프랑스, 홍콩)
출연 올렉 멘쉬코프, 줄리아 오몬드, 리차드 해리스, 다니엘 올브리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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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상의 반복되는 패턴에 작은 전환점이 하나 생겼는데, 이런 때일 수록 격렬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이야기가 땡기는 법이다. 무료할 때 그런 영화를 보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지금같을 때 이런 미친 로맨스는 매우 무척 굉장히 최고로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더 시기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러브오브 시베리아]감상을 마쳤다. 

밤새 이런 비극은 어디에서 오느냐, 난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하느냐에 사로잡혀있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일까,
아니면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의 차이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가 더 자기 자신의 사랑에 자신감이 있느냐의 문제일까,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여 과거현재미래를 다 팽개치고싶었던 적이 한두번 있었다. 그래서 난 안드레이의 순수한 감성이 이해가 가지만 지금의 난 아마 감당못할 것이다.어린 난 오만하지만 자신감은 없기에- 

제인에게 청혼하러 온 대위를 대신하여 청혼장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서 괴로워하던 안드레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그 때 제인은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그 상황을 겨우 넘기지만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가득 머금고 말한다.
"Do you at least understand what that boy did here today, what he has done to himself?" 

난 꼭 속으로만 불타고, 겉으로는 능글능글 비즈니스에 충실하는 제인이 미웠지만 사실 그녀는 나와 다르지 않다. 거의 비슷하다. 날 사랑하는 순수한 청년의 열정을 즐기는 것 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나 사실 그 청년이 날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한다는 속마음은 숨길수밖에 없다. 물론 이게 잘 숨겨지지는 않는 종류의 감정이지만, 비정한 상황은 보이는대로만 생각하게끔 만든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날 사랑한다는 확신보다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온 전신을 휘감게 되니까.  

결말은 아찔하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10년간을 그를 생각하며 그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단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그는 적어도 그 안에서 행복했어야 했다! 
여자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20분동안 10여년의 격정을 다 지워내지만 남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는다. 그러나 더 이상 그는 과거현재미래를 다 버리고 그녀를 쫓아갈 힘이 없다.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 추위, 눈, 보드카, 군인들의 오만한 눈빛과 젊음, 사랑과 결투. 하얗게 불타는 순수함. 
이곳에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 범죄다. 

2009.03.14 작성

(뭐야, 화이트데이에 이런 영화 보고 이런 리뷰 작성하고 앉아있었던거냐-_-)


주말에 안면도에 다녀왔다. 무려 세시간 반이나 버스를 타고 가는데 허리도 아프고 자도자도 도착을 안해서, 눈을 떴는데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심심하고 지겨워서 어쩔 줄을 모르던 우리는 내 아이팟 구경을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며칠 전에 급 땡겨서 다운 받아 두었던 [미녀와야수]를 클릭하게 되어 보기 시작했다. 

친구가 그러는데 나이 들어서도 이런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더란다. 나 말고도 있구나- 

이는 그야말로 나를 위한 만화가 아니었나 싶다. 나같은 외모지상주의인 애가 볼 때, 마지막에 벨이 야수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 I love you..흑흑 " 이럴 땐 정말 감동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런 짐승같은 외모의 야수에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니, 이것은 정말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경이롭다. 더 놀라웠던 것은 야수가 변한 왕자의 모습이 벨이 그토록 혐오하던 개스톤의 외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든것... 정말로 그녀에게 외모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다 알면서도, 매번 야수가 어떻게 생긴 왕자로 변할지 두근두근 기대를 하면서 보는데.. 별로 멋지지 않아서 정말 매번 볼 때마다!! 실망한다. 그런 근육빵빵 몸매와 남성다운 턱라인은 내스타일이 아니야. 외모지상주의여봤자,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의아해하기도 하는 외모의 남성을 추구하는 것 같다. ㅋㅋ 

어렸을 때 보고 지금 보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차이점은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다. 

개스톤을 쫓아다니는 난장이같은 남자가 있는데, 개스톤과 마을사람들은 그를 무지하게 괴롭힌다. 집단폭력은 물론이고, 추운 겨울에 눈사람이 될 정도로 몇시간이고 세워두고는 벨을 감시하게 한다. 손과 얼굴이 푸르딩딩하더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스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비굴하다.
어쩌면 어린이(혹은 어른)들은 내가 힘만 세다면, 약한 이들을 이렇게 마음껏 괴롭히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무서운 무의식의 세계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참 예뻐서 웃음이 났다. 제일 예뻤던 것은 마지막에 그들이 춤추는 장면을 스테인글라스화한 것이었는데, 소장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근나근한 벨의 목소리- 따라할테다 ㅎㅎ

왜 요즘들어 미녀와 야수를 보고 싶어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림책도 있었고, 퍼즐도 있었다. 아마 그녀를 닮은 인형도- 까먹고 있었지만 미녀와 야수가 나의 favorite 이었던듯. 아직도 자꾸 쫓기고,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꾸는데 계속 계속 성장하고 있는가보다. 언제쯤 어른이 될라나요?

2009.02.09 작성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2006 / 스페인, 멕시코, 미국)
출연 이바나 바쿠에로, 더그 존스, 세르지 로페즈, 마리벨 베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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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아침을 먹으려다가, 이왕 먹을 거 재밌는 걸 보면서 먹자. 란 생각에 이런 저런 오락프로그램을 골라보다가 시덥잖아서 가볍게 판타지영화나 한번 땡겨볼까 싶어서, 고른 영화였다. 

휴일 아침을 스펙터클하고 신나게 맞아볼까- 하는 나의 기대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는 첫 자막에서부터 무참히 깨지고 말았고, 무슨 아침을 1시간을 넘게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깨작댈 정도로 입맛이 급격히 떨어졌다. (밥이 문제가 아님) "마케팅이 안티-"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오필리어와 세개의 열쇠'라며 어린이를 현혹하는 글귀가 점차 황당해지는 약간의 적응기를 거친 뒤에야 영화에 빠져든다.  

분장이 참으로 예술이다.
CG보다 분장에 더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먼저 '판' 

처음에는 이건 뭔가요, 싶을 정도로 허접해 보였는데 보면 볼수록 이 생명체(?) 연기 참 잘한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 몸에서 풍기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아마 CG였다면 그 소소한 감정과 느낌들이 이렇게까지 잘 전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편인데, 윽박지르면 무섭다. 그러나 '판'은 약과!!  



이분 어쩔 것임????????? 

먹던 밥알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무섭다.
원래의 얼굴에는 콧구멍 2개와 입만 있는데, 잠에서 깨어나며 앞접시에 놓여있던 눈알 두개를 손바닥에 붙어있는 눈알 구멍에 집어넣고는 저러고 오필리어를 쫒아온다. 또 (이미지를 구하지는 못했는데) 미친 주먹보다 더 큰 구더기? 바퀴벌레? 무리들과 침을 쩍쩍 흘리는 대왕두꺼비는 정말 후덜덜-  입이 딱 벌어진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또 어떻고.

비주얼이 정말 감각적으로 잔혹하다.  

영화를 보면서 용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저 괴상한 괴물들에 대항하는 오필리어의 용기, 
내전은 끝났다며 자신들을 반란군으로 칭하고 쥐잡듯이 잡으러 다니는 군대에 대항하는 혁명군의 용기,  
자기 한 목숨 중요해서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사의 용기,
악독한 대령의 용기,(이것을 용기라 칭할 수 있다면) 
이 오바스럽게 잔혹한 이야기를 눈 똑바로 치켜뜨고 지켜보는 나의 용기. 

진정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껏 용기내어 힘들게 시도했는데 실패했을 때가 두려워서 어디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이마저도 아니라면 난동일테고.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수만가지 생각들 속에서 갈피를 못잡는 건 가끔 행복하다.
이 영화를 보는 수만명의 사람들 역시 각자 따로따로 다른 수만가지 생각을 했을 터- 

어디를 봐야할 지를 아는 사람에게로만 한정되겠으나, 이 어두운 이야기에서 지극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겠다고 자신하시는 분들께 강추해드립니다. 이만큼 지성적이고 감각적인 영화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 이왕이면 19세
+ 이왕이면 부제도 삭제 부탁

드래그 미 투 헬
감독 샘 레이미 (2009 / 미국)
출연 알리슨 로만, 저스틴 롱, 로나 레이버, 데이비드 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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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분위기의 도입부는, 분명 코믹요소 때문에 무섭지 않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음에도 나를 긴장케 만들었다. 약간 몸을 움추리고는 가방을 꼭 껴안고 얼핏 칙칙해보이는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며 잔뜩 무서울 준비를 하는데 순간 피식 웃음이 난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악령이 인간의 싸대기를 마구 날리는거야? 아, 이 영화 좀 괜찮다!  

영웅시리즈 영화에 알러지를 갖고 있는 나는 딱 하나 즐겁게 본 시리즈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파이더맨] 시리즈 였다. [아이언맨]이나 [배트맨] 처럼 돈으로 쳐 발라서 화려하게 화면을 치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히어로즈]의 주인공들처럼 초능력을 팍팍 쏴주는 것도 아닌 스파이더맨은 셀카를 찍어서 신문사에다 팔아 돈을 벌고 무기도 고무옷 하나다. 고무옷이 힘을 조금 주기는 하지만 악당에 비해서는 너무 약해서 시종일관 안쓰럽기만 하고 심지어 악당을 이길 수 있을지도 초조한데, 이게 스파이더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시리즈의 감독인 샘 레이미가 [드래그미투헬]의 감독을 맡았단다. 여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폴폴 풍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나 대신 지옥불에 불탈 사람은 누구인가' 를 다크써클이 가득한 눈을 치켜뜨고 밤새 고민하는 장면이었는데, 도대체 누가 영원히 지옥에서 썪을만한 영혼을 가졌는지의 물음을 나 자신에게로 돌려서 해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평소 인간의 악한 점을 더 자주 보고 가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의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화살표를 던지면 금새 그 당사자가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아, 벌레만도 못한 인간은 있을지언정 벌레만도 못한 영혼은 없을지리니.


깜짝깜짝 놀래거나 엽기적이고 구역질나는 장면들이야 공포영화니깐 그렇다 치자. 라고 말하기에는 정말 무섭고 토할 것만 같은 장면들이 한 가득이었다.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놓고 너 이제 놀랄 시간이야.. 라고 놀리듯 말해줘서 잔뜩 놀랠 준비를 해놔도 진짜로 흐읍! 하고 놀라버린다. 그만큼 기상천외하게 관객을 놀라고 무섭게 하지만(사실 이건 관객이 겁 없으면 안놀라겠지, 지극히 개인적이다.) 금방 또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내서 픽 웃어버리게 만든다. 이건 정말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고밖엔 말 못한다. 게다가 벌레는 정말이지 구역질나서 물 한 모금을 삼켜야 했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라님께 무서워서 목이 바짝바짝 마를지도 모르니 마시라고 장난치듯 말해놓고는 내가 다 마셔버렸다.

서양 공포 영화에서 이렇게 오싹해본 것은 [스켈리톤키]이후로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미신과 주술, 악령, 귀신 같은 것에 공포심을 느껴서인 듯 하다. 할리우드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대는 블러드 호러물에 스스로도 질렸는지 자꾸 일본이나 한국의 공포영화를 가져다가 만들어대더니 안되니까 돌파구를 마련한 듯 하다. 꽤나 괜찮은 돌파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공포샘을 자극하기도 하고, 서양적인 주술을 끌어다 쓰니 생경한 공포도 아닌데다가, 엽기와 호러도 부분적으로 잘 배치해 두었으니 꽤나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목부터 약간 오싹한데 표지 한 번 정말 잘 뽑았다.      

  

흑, 지옥에서 불타오르는 저 불길에 휩싸인 여인네를 보아라,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길래 이렇게 예쁜 여자가 지옥불에 휩싸이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


나와 너의 이야기_ 해운대

Posted 2009. 11. 18. 16:35
해운대
감독 윤제균 (2009 / 한국)
출연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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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들 중에는
최악으로는 빨래 쥐어짜듯하는 듯 해서 유치하고 울기 싫어 죽겠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는 경우가 있고,
중간으로는 정말이지 너무 왕창 슬픈 내용이라 울지 않을 수 없는 경우와 아주 조금만 슬퍼서 눈물이 고이는 경우, 
최고로는 별 거 아닌 것 같은데도 뭔가를 건드려서 엉엉 울음이 터져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민기가 엄청 멋지구리하게 나온다는 스포만 접수하고 봤는데도 이민기가 어케 될지 빤히 보여서 초장부터 눈물이 고인다. 
아, 이거 지금 웃긴게 나중에 다 울겠구나 싶어서 영화 내내 안절부절 못했다. 중간의 경우로구나~ 

설경구랑 하지원, 둘다 좋아하는 배우라서 봐야지 하다가 못보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그제 예상치 않았던 휴가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덕에 보게 된 영화 [해운대]. 전날 [투모로우]를 봤다는 친구는 피식피식 웃으며 가소로워하는데 애초에 영화코드가 맞지 않은 친구였으니 아예 투명벽을 세워놓고 영화에 집중했다.  

처음에 약간 어색할 뻔 했던 하지원과 설경구의 부산사투리는 어느덧 농익어 부산친구들을 연상케했고, 대사나 목소리들이 감성을 톡톡 건드렸다. 내가 막 우니까 친구가 자꾸 옆에서 놀리는 눈으로 쳐다봐서 짜증이 무지막지하게 나서 오기로라도 안울어야지 했는데도 계속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걸 보면 정말이지 영화 참 슬프다. 무섭기도 하고. 

사실은 며칠 전에 해일이 오는 꿈을 꿔서(아마도 해운대 예고편을 봤던 날이지 싶다) 영화 속의 몇십미터의 파도가 남일같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겪어봤던 실제적인 공포였으니까. 차라리 폭탄이 날아오면 빵 터져서 금새 죽겠지만 익사하는 건 아무래도 몇분의 고통이 엄청날테니 좀 더 무섭다.  

한국이 지진해일안전지대라는 건 이미 거짓부렁으로 판명된지 오래이다.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소재 선택이 괜찮았다. 연기도 당연히 좋았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코믹요소도 재미있었다. 단 한가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급의 빵빵 터지는 급의 재난영화를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것이다. 재난 자체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재난으로 인한 인간애를 그린 영화다. 

사실 대부분의 혹평은 이러한 기대에서 비롯되던데,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한다면 지금까지 자연재해의 피해가 미미했다. 바탕이 될 사실 자체가 없었으니까 이쪽으로는 상상해볼 여지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재난영화를 만든다면 초점은 자연히 '재난'에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재난으로 인한 사람들의 애정, 안타까움, 희생같은것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한국 정서에도 훨씬 맞고, 수많은 관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웰메이드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자본과 기술력이 헐리우드에 비해서 떨어지고, 우린 이제 초기단계임을 잘 알면서 어떤 CG를 기대했으며, 해일이 뭔지, 지진이 뭔지 직접 눈으로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면서 어떤 대단한 재앙이 한반도에 내릴지 기대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한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지금 당장 사무실 바깥, 학교 강의실 바깥 창문에서 수십미터의 파도가 덮쳐오면 내가 어떻게 할지, 누구에게 전화를 할지, 누구를 구해야할지를 상상해보며 영화를 봤으면 한다. 죽음 앞에서 어떤 미운 사람인들 그 순간엔 더 사랑하고싶어서 미칠 것 같은 그 마음을 상상하면서. 

[해운대]에는 메가쓰나미를 위한 것도, 일찌기 정보를 접하고 도망갈 수 있는 윗사람을 위한 것도 아닌 소소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마음 비우고 2시간, 재미있게 영화 보고 주위사람을 한 번씩 더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