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와 찌질함

Posted 2010. 1. 6. 13:44


지금껏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발자크나 제인오스틴,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에서 등장할 법한 '옷은 수수하게 차려 입었으나 타고난 기품이 몸애 밴' 여인에 대한 로망같은게 있었는데, 어제 폴라로이드 쿨캠을 사러 나갔다가 그런 여인을 만나고, 약간의 충격에 휩싸여있다.

어제 난 지하철에서 사람에 찡겨서 기둥에 오징어마냥 짜부러진 나머지 반으로 접혀지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찌질한 모습을 지하철 탑승객들에 선보였고, 밥 먹기 전에 커피를 마시기 싫다는 이유로(돈이 없단 이유로), 커피숍에서 기다리란 말에 덜덜 떨면서 커피숍 문 밖에서 기다렸다. 난 머리를 질끈 묶고는, 쌩얼에 거지같은 겨자색 목도리를 칭칭감고 더러워진 어그부츠에 패딩잠바를 입고 있었다.

검은 코트에 구두를 신고, 샤라랑 긴머리를 단정하게 반묶음을 하고 나타나선, 왜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숍으로 들어가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카메라 설명을 해주고 돈을 받더니 당당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니까 이래도 되는거구나,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거구나 하고 끄덕거리며 생각하는 거나, 
괜히 검정 코트를 꺼내들고 입고 출근하는거나, 
게다가 신발은 여전히 어제의 그 더러운 어그부츠를 신고 나온거나, 
그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거나,
이런 페이퍼나 올리고 앉아 있는,

아.. 이 찌질함의 표상이라니!

품위있게 살고 싶다. 난 '옷은 수수하게 차려 입었으나 타고난 기품이 몸애 밴' 여인을 로망으로 삼을 자격도 없다. 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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