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 이유
Posted 2009. 12. 6. 18:38담론(discourse, text)은 형상(image, figure)에 반대되는 의미로 쓰인다.
그림은 담론일까, 형상일까?
담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화풍은 원근법의 설정, 음영의 법칙이나 비율 등 이성에 근거한 예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감성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었다. 그림에는 해독이 가능한 기호와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그림 속에는 경배하고 숭배하는 대상들이 특별하고 신비한 aura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림이라는 2차원의 세계를 마주치는 것이 아닌 aura를 통한 3차원의 세계를 보았고 이것은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이자 허상이었다.
현대의 예술은 어떠한가?
기술이 발달하고 그로 인해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복제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졌다.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모호해서 인간의 사고, 즉 지각체계가 르네상스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다. 작품은 숭고미 없이 쇼윈도에 전시되어 사람들에게 언제든 즐거움을 준다. 작품이 갖고 있던 Aura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아도르노는 천박하게 보았고, 벤야민은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보았다.
현대에는 모든것이 담론화, 즉 텍스트화 되어버렸다. 텍스트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미술학자들은 예술이론을 인문학의 한 줄기로 규정지었다. 영화, 그림, 색 뿐만이 아니라 오묘하고 복잡한 세계를 직선적으로 대패질해서 투명하고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담론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경험하지만 이러한 감각적인 조우, 이미지는 담론화되어 점차 지워진다. (한 예로 파랑색은 빨강, 검정이 아닌 색으로 구별되는 것)기호화되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있는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텍스트가 초점에 맞춰져 있는 것이라면, 형상은 엇나간 것이다. 형상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이며 인상파 화가들이 표현하고자 한 시시때때로 변하는 진짜 세계, 순간적인 인상(impression)이다. 담론화되기 이전의 주관이고, 형상에 대한 정의는 있을 수 없다. 비담론, 비언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맑시즘도 자본주의가 담론화시킨 것이다. '사과'는 지칭이 아닌 배가 아니고 포도가 아닌 어떤 과일이라는 개념이다. 원초적으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디코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형상이 없는 이데올로기적 세계로 전락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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