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

Posted 2009. 12. 30. 11:46

 회사를 떠날 이유를 대자면 날이 새도록 말해도 입만 아프다. 내가 근 2년을 몸담고 월급뽕을 받아먹은 곳이기 때문에 말해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지만, 그래도 애정이 없는건 사실이다. 나도 데이비드 로지처럼 교수들의 실상을 낱낱이 까발린 책을 쓰고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심정이다. 이 얘긴 여기까지 하고.

아빠가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았다. 아빠를 뺀 모든 팀장이 잘렸고, 입을 모아 흉을 본다고 한다. 동시에 임원진에게 임원준비하란 말도 들었기에 남들 말엔 신경쓰지 않으신다고도 하셨다. 아빠를 증오할 때도 있었지만 부럽고, 존경스럽고, 듬직한 분이다. 내게 내외적으로 풍요로운 가정을 선사해주신 우리 아빠. 

내가 캐나다에 가겠다고 하자, 아빠는 뭐먹고 살거냐고 하셨다. 대학입학때부터 아빠는 뭐먹고 살거냔 말을 계속 하신다. 엄마는 어디가서 밥한끼 못먹겠냐며 옆에서 장난을 치시지만, 아빠는 내게도, 동생들에게도, 도대체 무엇을 먹고살거냔 말로 잔소리를 시작하신다. 나는 공부도 더 하고 싶고, 2년 일했으니 조금 쉬고 싶기도 하고, 그곳에선 알바를 해도 지금보다 더 벌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지루한 삶을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데 한 번 사는데 이런저런 경험을 더 해보고, 더 즐겁고 괜찮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왜인지 아빠가 무척 불쌍해졌다. 돈을 버느라 기회나 다른 꿈조차 가져보지 못했을 아빠의 20대가 갑자기 압도적으로 나를 덮쳐왔고,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대리, 과장달고 결혼해서 아이낳고 이런것만이 인생의 성공은 아니니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할거라고, 내가 마냥 놀고먹는 것만 좋아하는 것 같아도 계획이 있고 꿈이 있다고 믿어달란 말을 엄마에겐 할 수 있었지만, 아빠에겐 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나를 보고 당신의 자유로웠을 어린영혼을 회상하며 후회하실까, 뿌듯해하실까, 안타까워하실까 잘 모르겠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성공이나 명예같은 것에 집착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껏 아빠 마음에 드는 결정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큰딸을 가장 믿음직스러워하시는 분께 언젠가는 내가 자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미소를 지을 날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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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노예

Posted 2009. 12. 23. 14:25


*
다음달부터는 카드를 자를 예정이다. 실제로 가위로 자르고 끊어야지. 조만간 모아둔 돈으로 깨작깨작 살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해야 하기 때문에 카드는 더이상 안된다. 지난 2년간 아무도 눈치 못챌만큼 아주 조금씩 스물스물 늘어난 지출을 단기간에 반으로 줄일 수 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고, 두렵지만 해볼 예정이다. 술값, 옷값, 책값.. 포기할 수 있을까. 

**
회사생활이 힘든 건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인 것 같다. 친구같던 최대리가 내 위에 군림하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진정으로 퇴사를 꿈꿨다. 오늘은 여직원들끼리 회식이 있는 날인데, 까먹기도 했거니와 별로 가고 싶지도 않던 마음에 약속이 있다고 했더니, 세상에 세상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어떻게 까먹을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난 그만 지긋지긋해져버리고 말았다. 아, 꺼져- 라고 말하고 싶었다. 진심. 같이 점심먹는것도 짜증나는데 무슨 따로 회식거리고 있네. 

언젠가는 짜증나는 인간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들이랑만 만나고 살 수는 없는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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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홀리데이 1차 합격

Posted 2009. 12. 22. 10:26


두둥- 어제 밤 11시 넘어서까지 캐나다 대사관 홈페이지 새로고침만 연달아 누르다가 포기하고 잤는데,
채 6시간도 안되어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새로고침을 누르니 파란색 링크로 눌러달라고 아우성치는 합격자 명단!!!!

2차는 신체검사인데 뭐 떨어지진 않겠지;;;;

예전에 취업준비할 때 서류탈락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걸 절감했다. 발표가 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졌을 때의 허탈감을 어제 하루종일 느끼고 있었다. 일도 하나도 못하고.. 이제 관건은 일을 언제 그만두느냐. 부모님은 딱히 반대하는 건 아닌데 출국할 때까지 일하라고.... -_- 난 당장 그만두겠다고;;

아빠가 무척 엄하고 보수적이신 편이여서 허락을 안해주실 줄 알고 내 인생계획에 대해 프리젠테이션까지 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별말 없으시다, 책을 읽지만 말고 글을 써보는 건 어떠냐고 은근히 권하시는 걸 보면 이제서야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해주시는 것 같다. 


막상 발표가 나니 심란하기도 하다. 올해는 잘 몰랐는데 막상 이제 27이라니 무지 나이 많이 먹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떨어졌을 때보다야 나은 기분이겠지만 더 막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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